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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소현세자 독살

by M.T 2024. 1. 29.

조선왕조를 통틀어 세자가 왕이 되지 못하고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도세자이고, 두 번째는 바로 소현세자입니다. 

 

소현세자가 어떻게 왕이 되지 못하고 죽어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소현세자
독살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강석기의 딸 민회빈과 혼인하였으며,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습니다. 

그 후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인조의 미움을 받는 소현세자

 

청으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조선과 청간의 각종 연락, 공물의 조정뿐 아니라 포로를 중심으로 한 민간인 문제를 처리하는 일종의 대사관 역할을 수행합니다. 

조선과 청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청과 친분을 쌓고 뛰어난 외교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또한 8년간 심양에 머물면서 신문물을 접하여 천문, 수학, 천주교를 전래하는 등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조와 조선의 반청친명정책을 고수하던 서인들에게 반감을 사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소현세자는 8년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갔을 때 환영을 받기보단 냉대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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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만 가득한 소현세자의 죽음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인조와의 갈등으로 병을 얻게 되고 그 후 4일 만에 죽게 됩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고도 하지 않고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두릅니다. 소현세자의 사인은 학질인 것으로 진단되었지만, 인조실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의 시신은 온통 검은빛이었고,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기에 독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뒤이어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친정식구들과 세자빈 모두 죽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소현세자는 인조가 죽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왕세자로 청나라에 인질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청과 조선의 관계가 잘 유지되도록 노력했으며, 해외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소현세자는 역사적 희생자로 젊은 나이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다룬 작품

 

영화 올빼미와 드라마 연인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는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어도 픽션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봐야 하지만, 역사에 흥미를 유발해 주기에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올빼미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이며, 드라마 연인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소현세자의 죽음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두 작품에서 소현세자는 독살당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사실을 밝힐 수는 없지만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소현세자는 독살당했으며 그 죽음 뒤에는 인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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